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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수 1:7, 개정)
이제는 2011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이 다가옵니다. 아직 성탄 주일이 남아있지만, 올해는 달력이 좀 특이해서 성탄절 주일이 12월 마지막 주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제 2011년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며,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2012년을 맞이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사실 이 곳에 계신 모든 분들 중, 여태껏 살아온 연수가 가장 적은 저로서, 지난 시간을 돌아보자고 말씀드리는 것이 민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말씀에 담겨있는 귀한 통찰을 나누며,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지표를 삼을 수 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1장 7절 말씀입니다. 제가 다시 한 번 봉독하겠습니다. (다시 봉독)
이 말씀은, 우리도 알고 있다시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의 40년을 보내고, 가나안 땅 입성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여호수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40년의 고생스러운 시절들을 마무리짓는 시점에서, 약속의 성취를 앞두고, 새로운 시작을 향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특히 출애굽기와 민수기를 살펴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은 40년간의 여정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엿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40년간의 여정이 그리 만족스럽고 형통했던 시간들 이었던 것 같지만은 않습니다.
특히 민수기 말씀에 보면,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참 불평불만이 많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민수기 11장에 보면 이런 사건도 있었습니다. 만나를 먹다먹다 질려 불평을 합니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는 오이도 먹고, 참외도 먹고, 부추와 파와 마늘을 먹었건만.. 이제는 만나밖에 없으니 눈에 보이는 게 없구나” 이러면서 온 백성이 소리내어 울고 있는 모습입니다. 공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보다는 본인들이 처해있는 비관적인 상황에 낙심하고 있는 중입니다.
좀 지나서 14장에 보면, 가나안 땅 정탐을 다녀온 후에, 직접 하나님을 비난의 대상을 삼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셔서, 우리를 가나안 땅에 거인들에게 죽게 하시려는가..’ 조금 더 가면 16장에는 이런 일도 있습니다. 지도자 모세에게 반기를 품고 이스라엘 백성들 일부가 자기들끼리 새로운 지도자를 삼고자 반역을 꾀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사건들의 공통점을 구지 찾자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처하게 된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에 대해 비난의 화살을 기어코 누군가에게 돌리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 비난의 화살이 나 자신을 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으로 투정하며 울고 있을 때, 모세는 그 비난의 화살을 자기 자신에게 돌렸었습니다. 민수기 11장 14절-15절 말씀입니다.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 지금 이 경우에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에 대해 자기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삼자의 입장에서 성경을 읽을 때는 이런 모습들이 사실 참 어리석게 보이기도 합니다. 성경의 내용을 이미 파악하고 사건의 결과를 알고 있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것은 이것 또한 우리의 모습이라는 사실입니다. 피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절망할 때에, 나 자신의 의도대로 일이 풀려나가지 않을 때에 우리는 어디론가 비난의 화살을 던지게 됩니다. 때로는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 비난하곤 합니다. 하지만 어떨 때에는 무능하고 부족한 내 스스로를 탓하며 자책에 빠지곤 합니다.
한 번 예를 들어 설명드리겠습니다. 저와 같은 전도사의 경우에는 이런 상황이 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회에 전도사로 청빙이 되어 섬겨야 하는데, 신학생의 수만큼 교회의 수가 넉넉하지 못합니다. 그러다보니 졸업생들 중 일부만이 교회에 청빙이 되어 전도사로 섬기게 되고, 일부는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따라서 청빙 과정을 거치는 것 자체가 치열한 경쟁이 되곤 합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저와 제 주위 친구 전도사들을 볼 때에 두 부류로 나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가 무능하고, 경력이 화려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안되는구나. 내가 못나서 아무 교회도 나를 받아주지 않는구나..’ 하고 자기 자신을 자책하는 전도사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좀 더 거창한 시각으로 한국 교회 자체를 비판하는 전도사들도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현실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다. 하나님 일하겠다는 사람들한테 경쟁을 붙이고, 일부는 낙오될 수밖에 없는 한국 교회 자체만의 구조적인 문제가 바로 원인이다’ 하며 상황을 탓하는 무리도 있습니다. 저 또한 그 양쪽을 왔다 갔다 하며 무엇이 근본적인 문제인지를 고민하며 탓했던 적이 있습니다.
사실 이런 예들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집니다. 물가가 오르고, 경기가 안좋아지면서 쉽게 발견되는 어려운 상황이 있습니다. 실직자들이 생기고, 생활고를 겪게 될 때에도 비난의 화살이 두 부류로 나뉘는 것을 보곤 합니다. 자기 자신을 비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 때문에 우리 식구들이 이런 고생을 하게 되는구나.. 내가 벌이가 괜찮으면 우리 식구들한테 더 좋은 것들을 공급할 수 있을 텐데.. 가족들아 미안하다’ 하면서 자기 자신을 탓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면에 이러한 경제 상황을 이끌어 낸 정부 정책을 향해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무리들도 있습니다. ‘정부 정책이 효용적이지 못하다보니까 이런 상황을 이끌어 낸 것이 아니냐’라고 하며, 때로는 특정 정치인을 향해 비난의 화살을 던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거창한 예를 구지 들지 않더라도 이러한 예는 우리 일상에서 쉽게 찾아지곤 합니다. 나 자신을 향한 비난, 혹은 내가 처한 이 현실을 향한 비판, 양극으로 나뉘어져서 그 사이를 끝없이 왔다갔다 하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양극을 넘나드는 우리 자신의 모습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한 신학자는 인간의 잘못, 즉 죄를 정의함에 있어서 교만과 태만, 그리고 기만 세 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한 바 있습니다. 교만이라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높여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모습을 뜻합니다. 반면에 인간이 자기 스스로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본인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을 태만이라고 합니다. 기만은 거짓과 관련된 모든 죄를 뜻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교만과 태만에 관한 부분입니다. 교만과 태만은 서로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우리가 교만과 태만이라는 죄의 의미를 더욱 깊이 이해할 때, 여기서 또한 양극을 쉬도 없이 넘나드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생각할 때 ‘교만하지 말아야겠다’, 즉 ‘스스로를 높이지 말아야겠다’고 하여, 교만을 멀리하고자 노력하곤 합니다. 진정 우리는 교만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합니다. 하지만 교만하지 않으려는 지나친 노력에서 문제가 비롯되기도 합니다.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려는 나머지, 지나친 겸손이 일을 그르치게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하나님 나라의 직책이 있는 것입니다. 임명을 받고 세우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 저는 할 수 없습니다..’로 일관하곤 합니다. 우리에게 맡겨주신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못나고 무능할 뿐입니다.’라고 일관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모습은 마치 신앙의 미덕을 보이는 겸손의 모습으로 여겨지곤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임을 고백하는 것은 너무나 옳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맡겨진 책임이 있을 때에도 스스로를 무능하게만 여기고, 책임에서 도피하려고 하는 것은 건전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교만을 피하고자 교만이 태만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교만의 반대 극단에서 우리의 잘못을 발견하는 경우입니다.
한편 태만의 죄 또한 태만의 반대 극단에서 그 잘못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직분 아래 태만하지 않고자 부단히 노력합니다. 태만하지 않으려고, 즉 게으름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고자 하는 열정있는 모습이 참 좋습니다. 하지만 태만하지 않으려는 열정이 지나칠 때에도, 그 반대 극단에서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책임감을 느끼고 열정을 보이는 것은 좋지만, 그 열정이 지나칠 때에 방향성 없는 열정이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는 경우입니다. 어디서 봤는데 ‘뭘 할지 모르면서 열정만 있는 직장 상사가 가장 피곤하다’라는 우스개 말을 본 적이 있습니다. 맹목적인 열정이 도리어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더 무서운 것은 열정이 아예 잘못된 방향을 향해 설정되어 있는 경우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슬람교 근본주의자들의 잘못된 열정이 온 세계를 테러의 위협에 떨게 하고 있는 것도 비슷한 유형의 예입니다. 여기서는 태만하지 않으려고 지나치게 노력한 나머지 자신의 권한을 넘어서, 태만이 교만이 되어 버리는 예를 찾게 됩니다.
지금까지 양 극단을 넘나드는 다양한 예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만족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 있습니다. 뭔가가 잘못 진행되고 있으며, 우리의 계획과 의도대로 해결점을 찾기가 힘든 상황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문제의 원인을 누군가에게 돌리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자책하며 비난하는 경우가 있으며, 처해 있는 상황을 비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양쪽을 넘나들며 무엇이 문제인가, 누구의 책임인가를 고민하는 중에도, 이를 해결하려는 우리의 노력에서 또한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교만함을 내려놓고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할 때 태만의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상황 속에서 나에게 주어진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태만하지 않으려고 넘치는 열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지만, 지나친 열정이 나를 교만의 위험으로 이끌어갑니다. 나에게 주어진 책임과 본분을 넘어서는 열정이 나를 교만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구지 말로 표현하고자 할 때, 약간 복잡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이는 우리가 항상 빠지게 되는 딜레마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옳은 걸까요? 어느 쪽에 서는 것이 가장 신앙적인 선택을 내리는 걸까요? 어떤 행동이 교만도 태만도 극복하는 성숙한 모습일까요??? 이에 대해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 어느 극단에 처하는 것도 옳은 선택이 아니라고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구조를 잘 보면, ‘여호수아야 너는 이렇게 하고, 이렇게는 하지 말아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하지 말라는 명령은 결코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않은 것일까요?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추스릴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처한 상황을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이 필요한 것입니다. 내 스스로의 상황을 마치 내가 제 삼자가 된 것처럼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경기장의 벤치에 앉아서 운동경기를 관람하듯이, 내 자신과 우리의 상황을 관전하듯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말로는 참 쉽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결코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나를 옭아매고 있는 모든 상황이 나의 마음을 너무나 힘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원인이 나라고 생각할 때, 열등감이 나 자신을 사로잡습니다. 상황을 악화시킨 누군가의 잘못을 탓할 때에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없는 스스로의 무능함을 탓하게 되고, 모든 열정과 쏟아 부은 노력에도 해결되지 않는 상황이 야속하게 느껴집니다.
이에 대해 오늘 본문은 또한 말씀합니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상황을 냉철하게 바라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강하고 담대한 마음입니다. 내 스스로가 처한 상황을, 우리 공동체의 상황을 관전하듯 바라보고자 할 때에, 감정에 휘말리지 않는 냉철한 판단을 위해서는 오직 강하고 담대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숙한 신앙의 선배님들을 볼 때에 이러한 모습에 깜짝 놀라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모습입니다. 울어야 할 상황에도 미소 짓는 여유가 있습니다. 또는 반대로 기뻐 뛸듯한 상황에 절제함을 보면서 이 분이 얼마나 강한 영성을 지닌 분이신지를 깨닫곤 합니다. 어떠한 공격에도 감정이 무너져 내리지 않는 강한 내면이 사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경험을 통한 믿음의 연단이 강하고 담대한 신앙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않고, 강하고 극히 담대함’을 이루었을 때, 우리에게 남겨진 다음 과제는 이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알고있는 신앙적 가치들에 따라 판단하며 행동해 가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신앙의 규범이 있었습니다. 그 대표로 레위기의 말씀, 즉 상황에 어떻게 판단하여 대처할지에 대해 일러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던 것입니다. 율법서의 말씀에 따라 제사를 드릴 때에는 어떤 절차를 통해 드리고, 혹시라도 소가 사람을 받았을 때에는 그 상황을 어떻게 처리하고, 심지어 몸에 종기가 났을 때에는 어떻게 처리하라는 것까지, 아주 상세한 지시기 있는 말씀입니다. 상황 속에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지켜서, 율법의 말씀을 따라 판단하여 행하는 것이 여호수아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 말씀을 똑같이 적용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21세기 다원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민족을 데리고 광야에서 나오던 그 시대보다, 훨씬 더 복잡해진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를 레위기에 있는 율법 말씀에 빗대어 해결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신앙적으로 사고하는 법에 대해 더욱 배워야 합니다. 레위기 뿐만 아니라 구약성경 전반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에 대해 더욱 깨달아 배우고, 신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을 조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통해, 또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해 생각하고 판단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몫으로 주어집니다.
이를 통해서 상황을 바라보고 판단할 때에 우리는 더욱 성숙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됩니다. 이 모든 상황 가운데 무엇이 가장 신앙 안에 순리대로 따라가는 것인지, 이 상황에서 무엇이 가장 적합한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내 주변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 상황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 상황 속에서 누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 이 상황이 나에게 주는 도전이 무엇이며, 나는 어떻게 반응할지를 주시함으로서, 우리 삶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향해 접근하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저를 다시 예로 들자면, 성도님들께서도 보이시겠지만 뭘 하더라도 어리버리해 보이는 제 모습이 있습니다. 이런 모습이 사실 제 자신에게 많은 열등감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열등감에 빠져들 때면 더더욱 이런 마음이 듭니다. ‘내가 과연 뭘 할 수 있을까’,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넘어서야 하는데.. 도대체 뭘 어떻게 하나’ 그러면서 기도합니다. ‘오 하나님, 제가 잘 감당해야 하는데 제가 부족해서 자꾸 일을 그르칩니다. 상황이 악화됩니다. 제가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분명히 정당하고 필요한 기도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제 삶이 이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매일 감당하게 해달라며 제 스스로에게 초점이 맞춰있는 기도만 하게 되고,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점점 움츠려들기만 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 모습이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겸손한 모습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 이것은 좌로, 혹은 우로 치우쳐 있는 모습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극복할까요? 내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상황을 주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누구도 책망하지 않습니다. 이 상황이 내 잘못, 혹은 누군가의 잘못이기보다도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 상황을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이 상황 속에서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신앙 안에서 가장 순리대로 따라가는 것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지금 이 상황 속에서 가장 신앙적으로 합리적이고 타당한 결정이 무엇인지에 대해 모색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상황을 주시하고 판단할 수 있는 통찰력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가장 신앙적인 결정인지를 판단하기 위해 우리는 끈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묵상해야 합니다. 많은 상황 속에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어떠한 결정을 내렸는지에 대해, 이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필요한 것은 책임감입니다. 내가 상황에서 도피하고자 할 때, 하나님의 뜻이 나를 향해 다가오지 않습니다. 나와 우리 공동체가 처한 상황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주시할 때, 무엇이 가장 적합한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 보석과 같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함으로서 우리의 기도 또한 더욱 성숙해집니다. 전에는 ‘잘 감당하게 해 주소서’, ‘내 부족함을 채우소서’ 라고 하며 내 자신에 초점을 맞춘 기도를 드렸다면, 이제는 거기서 벗어나서 좀 더 본질적인 기도를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상황에 맞서 하는 본질적인 문제에 대항해서 기도할 수 있는 시각이 생깁니다. 누가 나의 기도를 필요로 하는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대상이 어디인지, 내 자신에 초점을 맞춘 기도에서 벗어나서 더욱 상황에 따른 구체적인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즉 내 자신을 향한 기도를 넘어서, 본격적인 중보기도가 시작되는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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